실망했던 세상
이생진
누구나 한 번쯤은 실망했던 세상을
그래도 달래 가며 살아가는 것은 기특하다.
어지러운 틈새로 봄이 순회처럼 들어오면 꾀꼬리 걱정을 하고
나뭇잎이 푸르르면 내 몸매도
유월로 차리던 사람
일시불을 꺼내주며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살라고 졸라도
살아가기 막막한 때가 있겠지만
월부를 꼬박꼬박 치르며
끝까지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그 누구의 노예로도 남아있길 부정하며
모르는 사이에 노예로도 살고
그 누구의 그리움에도 한번은 미쳐 살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운 표정을 하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남이 보기엔 쓸모없는 노구일망정
옷깃을 여미며 꼿꼿이 예절을 바로 세워놓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생활이 하도 쓸쓸해서
시간을 피해 나와 서성거리다가도
다시 그 생활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보면 기특하다
털어놓고 보면
누구나 한번씩은 해보았을 자살미수
그래도 껄껄 웃다가 가는 것을 보면
사람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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