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시詩와 차茶와 선禪

주혜1 2014. 11. 17. 11:12

시와 차와 선

  이숭원

 

시와 선

 

시의 역사는 오천 년이요, 불교의 역사는 이천 오백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이라 말하는 참선의 역사는 달마대사의 전래 이후인 천오백 년이다. 감각과 정신의 극점을 추구하는 시에는 선의 영향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시선일여론이 나온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엿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선사들은 게송을 많이 지엇는데 그것이 전부 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잇기 때문에 당연히 시와 선이 통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또 당송 시대에 시인들이 작품세계도 선이나 도와 상통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게 되엇기 때문에 시선일여론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정착된 후 그것을 함리화하는 논술이 나타났는 바 그 골자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선의 직관적 깨달음과 시의 직관적 깨달음은 상통하는 바가 있다

2. 언어의 함축적 표현헤 상통하는 바가 잇다. 언어도단, 교외별전이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언어의 지시작 기능보다 언어의 연상적 기능, 정서적 기능에 관심을 갖는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기를 선불교는 중국화된 불교라고 한다. 인도의 대승사상이 인간의 의식 현상을 관ㄴ념적으로 탐구하는 유식학으로 귀결되엇는데 중국의 선종은 인도 불교의 이론적 추구에서 벗어나 진리에 직접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앗다. 논리적 변설에서 벗어나 직관적 각성을 중시하는 태도가 선종을 낳게 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선불교로 정착되어 선의 항금시대를 이루는 과정에서 이미 민중에 뿌리늘 내린 노장사상에서 이미 사용하던 어휘를 차용해서 해석의 편의를 도모한 것이다. 도가사상과의 교섭을 통해 인도의 유식 불교는 인간 내면의 각성을 추구하고 주체적 초탈을 강조하는 중국의 선불교로 변화한 것이다.

선불교가 추구화는 직관적 각성의 표현은 대부분 시의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중국의 문학적  관습으로 전해 온 절구나 율시의 형식이엇다. 이런 과정에서 시는 선의 경지를 표현하는 언어 형식이 되엇고 선승이 아닌 일반인들도 그러한 미묘한 정신 상태를 표현한  시에 매력을 느끼고 선취를 풍기는 시를 창작하게 되엇다. 시와 선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하단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선이 기존의 관념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선에 의해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듯이 시도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교유한 방식으로 대상을 인색하고 그서을 다시 독툭한 방법으로 표현핟나는 유사성을 지닌다.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속에서 얻은 새로운 개달음을 표현하단는 점에서 시와선은 행복한 동행을 하게 되엇다

 

2. 차와 선

 

선종이 당나라 때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음용하던 차가 선과 밀착되어 다선이여론이 제기되엇다. 다선이여론의 근거로 주로 거론 되는 일호가 조주 스님의 이야기다.

불교에서 참선의 주제에 해당하는 것은 공안이라고 한다. 중국의 역대 공안 100개을 모아놓은 책이 벽암록인데 벽암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운문이고 그 다음이 조주스님이다. 조주는 평상심이 도라는 점을 강조햇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차나 마시고 가게' 의 고사다.

어느 날 한 납승이 와서 불교의 진리를 물엇다. 조주는 전에 이 절에 와 본적이 잇느냐고 물엇다. 납승이 처음이라고 하자 조주는 '차나 마시고 가게' 라고 말햇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본 주지가 스님은 처음 온 사람에게도 전에 왔던 사람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니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조주는 '자네도 차나 마시고 가게' 라고 말햇다. 여기 담긴 뜻은 굳이 풀이한다면 불교의 진리는 관념적으로 탐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지각되고 실현된다는 것을 일러준 이야기로 해석된다.

조주의 일 일화는 선과차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초의 예로 오래전부터 굳건한 자리를 지켜왔다. 차와 선의 관계는 송나라 때 승려인 원오 극근 선사가 다선일미라는 글을 남김으로써 더 욱 일반화 되엇다. 차와 선의 친영성 음과 같은 요지로 정리된다.

1. 차와 선은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한다

2. 차와 선은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를 지향한다

3. 차와 선은 조용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우리 나라에서 다도의 의미를 문서로 남기고 다도를 둥흥시킨 사람은 초의 선사 이다. 대흥사 뒤편 산 중턱에는 초의 선사가 그의 다선일여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주석한 일지암이 잇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 동다송과 다신전을 펴냈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차와 선의 일치라는 정신적 경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엇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초의선사를 만나 차를 매개로 인연을 맺어 시문과 서화를 주고받으며 친교를 이어갔다.  실제로 차밭을 일구어 차를 재배하고 제조하여 음용한 정약용은 자신의 초당을 다산초당이라고 명명하여 다신을 자신의 당호로 삼았다. 다산이 초의선사를 평하기를 승려의남루한 겉모습 속에 유생의 뼈를 담고 잇다고 한 것으로 보아 초의선사는 시서화에 능했던 것 같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초의선사는 한양에서도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된 시대라 초의선사는 한양 외고가에서 완당 김정희 정조의 사위인 홍현주 자하 신위, 다산의 맏아들인 정학연 등의 문인들과 교분을 쌓앗따. 그는 이러한 교류 속에 자연스럽게 차를 가까이 하는 기풍을 세속에 전하면서 유학자들에게 선종의 정신세계를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3. 완당 김정희와 선불교

 

추사 완당 김정희는 조선 500년 역사에 보기 드문 천재다. 그는 24세때 부친을 따라 ㄹ북경에 가서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여 타고난 문재와 박학다식으로 청나라 인사들을 놀라게 햇다. 그는 그곳에서 고증학과 금석학의 이론 실사구시의 학풍을 배워 조선조 북학 연구의 일인자가 되엇다. 타고난 천재였기에 자신이 아는 것을 과감히 개진하여 여러 사람의 질시와 지탄도 받앗따. 그는금석학에 바탕을 둔 역사 연구로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와 황초령 순수비 경주 무장산비 경주 서약동 고분등 새로운 사실을 발견햇으며, 중국의 역대 서체를 수용하여 자신의 개성을 변용한 독특한 필체를 시험하고 개발하엿으며, 성리학에 바탕을 둔 선비이면서 불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이론을 전개햇다. 그리고 불교적 선취를 머금은 시와 서를 발표하여 조선 후기 예술사의 변별적 전기를 만들엇따

김정희의 불료에 대한 관심이 언제 싹텄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증조부 감한신이 원당 사찰로 고양 예산에 황암사를 짓고 그이 부친 김노경이 경상감사로 잇을 때 가야산 해인사에 시주하여 사찰을 증건한 것을 보면 유학자 집안이면서도 불교에 발원하는 가풍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동갑의 승려인 초의선사와 교분을 나눈 후불교에 더욱 기울어지게 되었고 차를 대하는 마음도 깊어졌다. 초의선사와 첫 만남은 1815년 30세 때에 수락산 학림 암에서 해붕대사와 선문답을 나룰 때 이루어졌고 그 교분은 완당이 세상을 떠난 이후까지 이어졌다. 특히 제주도 8년, 북청 1년의 유배기간에는 거의 차에 중독된 사람처럼 초의선사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간청의 서신을 수없이 보냈다.

완당은 부료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초기에슨 신앙의 대상으로여기지는 않았고 유학과 상통하는 철학적 사유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는 30대에 가내의 원찰인 예산 화암사 되편 바위에 천축고선생댁이란 문구를 새겼다. 인도 옛스승의 집이란 뜻이다. 석가모니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스승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부처를 절대자로 숭앙하는 입장이 아님을 알 수 잇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관점에서는 인도 예스승이란 말이 불교의 진수를 파악한 내용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잇다. 이 당시 완당의 불교 이해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33세때에 쓴 해인사 중건 상량문은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해서로 되어 있는데 불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보통의 경지가 아님을 짐작하게 하낟. 연도는 확실치 않지만 중년의 소산으로 추정되는 작품에는 반야심경을 사본한 것도 잇어서 그가 불교의 공사상에도 근접했음을 알게 한다.

완당은 1840년 55세 때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되는 유배형을 받았다. 귀양 온 지 4년째 되는 1843년 77세의 노승 백파대사와 선에 대한 견해 차이로 편지를 통한 일대 논전을 벌인다. 이것이 완다의 유명한 백파 망증 15조다. 완당은 일찌기 백파의 정혜결사문에 대해 유학가 불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들어 백파가 결사문에서 말한 것이 자신의 뜻과 부합한다는 서신을 보낸 적이 있다. 극러나 선이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자리에 선 것이다.

완당은 매우 공격적인  어사로 백파의 견해를 비판했다. 백파에 대해 먼저 반론을 제기한 것은 초의선사였다 백파가 내놓은 선문 수경에 대해 초의선사가 [선문사변 만어]를 지어 비판했던 것이다. 완당은 그의 벗인 초의선사의 비판을 보고 백파에세 편지를 보내고 백파의 답변이 오자 다시 그것을 비판하는 격론을 집필하여 응답한 것이다. 후손이 쓴 완당 김정희선생 묘비문에는 선생이  평소 화평하고 화기애애했으나 의리나 이욕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서 감히 막을 자가 없엇다"고 적혀 잇다. 제주도 벽지에 4년 동안  위리안치 되어 있으면서도 그 기개와 성벽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화엄종계의대사를 향해서도 자신의 선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는 ㅈ럼에서도 그의 불교이해는 대단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잇다.

오랜 세월이 흘러 완당은 북청의 윻배에서도 풀려 67세 이후 과천에 정착했다. 70세 되는 1885년 봄 백파 스님의 제자가 찾아와 3년 전 세상을 떠난 스님의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은 1852년 4월에 입적했는데 그때 완당은 북청에 유배중이어서 스님이 입적한 것도 모르고 있엇다.완당은70세의 나이에 굳은 손을 녹이고 아픈 팔을 들어 올려 마치 12년 전 자신의 방자한 반박에 사죄하는 듯 전력을 기울여 백파 스님의 비문을 썼다. 비문은 해서로 쓰고 비석 되의 명문은 행서로 썼다. 완당 만년의 정체에 입각한 단아한 행서 금석문을 남긴 것이다. 그 비문과 명문을 다음과 같다.

 

華엄宗주 白坡大律師 大機大用支碑

 

우리나랑는 근래에 율사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엇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잇다. 그 때문에 여기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와 대용, 이것은 백파가 팔십 평생 가장 강조한 것인데 혹자느 ㄴ기용과 살활으맂루하게 천착하엿따고 하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세상 만물을 대함에 어느 것이나 살활과 기용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뜻을 모르고 망령되이 백파가 살활과 기용에 지박했다고 말하는 것은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드는 것이다.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잇겠는가?

엣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으로 변증한 것은 세상사람드링 헛ㄱ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모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니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 해도 모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어찌하면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 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대기기요, 이 네글자를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 부족하다 할 것이다. 이를 써서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완당은 자신이 소장하고 잇던 달마대사 화상을 문도들에게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게송까지 지어 보냈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달마 같은데            遠望似達磨

가까이 보니 곧 백파로다                  近着卽白坡

차별이 있음을 갖고서                      似有差별

불이무에 들어갓네                          入不二問

흐르는 물은 오늘의 모습이요            流水今日

밝은 달은 옛모습이로세                   明月前身

 

비석의 명문에는 지난 날 자신의 거친 반론에 대한 반성의 마음가 백파의 도력을 칭송하는 자세가 담겨 있고 게송에는 불교의 한 경지에 대한 완당의 께달음이 담겨 잇다. 이와 같은 게송은 일반 유학자느 물론이요, 선승에게서도 쉽게 나올 수 잇는 것이 아니다. 완당은 선의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앞에서 시와 선이 상통하느 바가 직관적 깨달음과 언어의 함축적 표현에 잇고  차와 선이 상통하느 바가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ㅐ 하여 무념무상의 조용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 했다. 시와 차와 선이 조응을 이루어 빚어낸 노년의 적적한 경지르 ㄹ보여주는 완당 말년의 작품을 소개해 보겟다. 이 작품을 보면 완당의 시의 경지가 차선일여의 겨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그루 늙은 버들 두어 서까래 집에

머리 하연 영감 할멈 둘 다 쓸쓸하네

석 자 아니되는 시냇가 길 못 넘고서

옥수수 가을바람에 칠십 년을 살았다오

(갈가의 마을 집이 옥수수 밭 가운데 있는데 두늙은 영감 할몀이 희희낙락하게 지낸다. 그래서 영감 나이가 몇이냐 물었더니 일흔 살이라 한다. 성울에 올라가 보았느냐 하니 평생 관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무얼 먹고 사는 가 물으니 목수수를 먹는다고 햇다. 나는 마냥 남북으로 떠다니며 비바람에 휘날리던 신세라 노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였다. [題村舍壁]

 

최고의 반찬이란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나물              

푀고의 모임이라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이것은 촌 늙은이의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만한 큰 황금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고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칠십일과]

 

이 작품을 쓴 1856년 5월 해붕대사의 제자에게서 스님의 영정을 만들었으니 찬을 써달라는 부탁이 왔다. 해붕대사는 40년 전인 1815년 30세 때 수락산 학림암에서 만나 선문답을 나눈 승려이고 그때 초의선사를 만나 평생의 교분이 이루어지게 한 그분이다. 완당은 71세의 나이에 아픈 팔을 들어 마지막 기ㅣ력을 다해 찬을 쓰고 부탁한 승려에게 답장도 썼다. 그 답장에서 완당은 영정을 만드는 것이 자신이ㅡ 듯에 맞지 않지만 해붕노사는 나의 옛벗이므로 신병을 무픕쓰고 글을 써 보낸다고 했다. 마음껏 써내지는 못한 것 같다고 겸손의 말도 하며 병세가 심하여 ㅣ만 줄인다고 끝맺었다. 이 [해붕대사화상찬]은 완당이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 만든 "최말년의 기념비적 작품(유홍준)'으로 평가된다. 그 내용을보면 완당의 공空에 대한견해가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된다.

 

해붕대사가 말하는 공은 오오개공의 공이 아니라 공즉시색의 공이다. 혹자는 스님을 공의 으뜸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혹자는 참된 공이라고 하나 이는 그럴 듯하게 들릴 뿐이다 참됨이 공을 얽맨다면 그 또한 해붕의 고이 아니다. 해붕의 공은 해붕의 공일 뿐이다. 공이 튼 깨달음을 낳는다는 것도 해붕에 대한 어긋난 풀이이며 해붕의 공이 홀로 나아가고 홀로 통하낟는 것도 잘못된 풀이다.

 

완당은 이 찬문에서 40년 전에 삼각산과 도봉산 사이에서 본 해붕대사의 모습을 30년 전이라고 착각하고 기술했다. 71세의노인이니 풍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세월으 단층을 넘어 영정의 찬문을 쓴 완당의 도타운 정성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훗날 완당의 벗인 초의선사는 이찬문을 보고 깊은 감회에 젖어 발문을 지어 함께 표구했다. 40년을 지켜온 선가의 인연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완당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봉은사를 왕래했다. 봉은사의 남호 영기스님은 [아미타경]과 [무량경]을 판각하여 간행하고 이어 방대한 [화엄경]을 간행을 준비하고 있었따. 완당은 아직도 유배지에 있는 평생의 지기 권돈인에게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고 편지에 써 보냇다. 영기 스님이 [화엄경]80권을 간행하고 경판전이 글씨를 완당에게 부탁하자 완당은 '판전'이라는 글씨를 써 주엇다. 그것이 9월말이고 10월 10일에 완당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 글씨는 완당의 최후 작품이 되엇다. 그 글씨를 보면 시와 차와 선이 일체를 이룬 노년의 담담한 결지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어린아이 그 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유홍준)고 한 것도 바로 이 경지를 말로 풀어 설명한 것이리라. 어쩌면 그것은 [화엄경]의 대의를 압축한 다음 4구게의 핵심을 글자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삼세 모든 부처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현상계의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통찰해야 할 것이다.

 

若人欲了知三世一切佛

鷹觀法界性一切唯心造                      -평론가  이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