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김현승 시의 '가을'과 '차'/ 유성호

주혜1 2014. 11. 19. 20:51

김현승 시의 가을과 차

           유성호

 

 

원래 시간이란 지속성과 불가역성을 그 본질로 하느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실페이다. 하지만 그것은 느끼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의미화할 수 잇다. 누구에게는 시간이 너무도 잛게 지나가는 듯한 체감을 안겨주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너무도 더디 가서 일종의 권태감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의 삶이 견지하고 있는 긴장의 밀도만큼만 의미화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관거, 현재 및 미래는 균질적으로 구획된 시간적 연속의 마디들이 아니고, 한데 뭉쳐서 현재의 이 순간을 충일하게 구성하는 세 가지 방식일 뿐이다.

김현승의 시에 줄곧 현출되는 시간관은 객관적 역사와는 다른 주관적 세월에 집중되어 잇다. 김현승은 시간대를 달리 하면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펌예한 반응보다는 계절의 추이가 가져다 주는 인생론적 성찰의 공간에 침잠하기를 즐기는 시인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고독의 시간적 형식인 추억에 잠길대가 많고, 또 기억이 공간화한 상관물로 나타나는 종점을 그리워하곤 한다. 이는 전체 역사 관정을 하나의 유기체적 통일 로 설명하고 시간이야말로 신의 섭리와 의도가 관철되고 실현도는 구체적 장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적 시간관과는 어쩌면 철저히 무관한 것이다.

 

수염을 깎는 비누 거품같이

窓들이나 헤어진 壁위에

발려 있던 저녁 안개들......

 

밤이 길어갈수록

뱃고동소리처럼 뿌옇게 四면으로 퍼진다.

 

이러한 밤에는

終點附近이나 어디서 서성거리던 나의 버릇.

이러한 밤에 서울에 나리면.

곧 아내에게 편지를 쓰던 나의 버릇.

 

지금 골목과 골목들은

깊은 悔恨에 잠기고

눈들은, 信仰을 위하여 다시 한 번 아름답고 고요하게 失明되어간다

山에서 진다는 하이얀 장미의 얼굴과 같이...

 

지금은 殺伐하던 街角도 부스러져 가고

金屬性 燈불에도 입김이 흐리운다

 

이러한 밤에는 哲學이란 굳은 빵 조각/

鐘路와 明洞은 시가아를 피우고 저으기 눈을 감는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다!

무엇인가 오래인동안 잊어버렷던 이 거리의 音響을 위하여

마른 마누가지와 鋪道와 멀리서 들려오는 신발 소리도

조금씩은 눈물기와 信仰에 젖은 저 어렴풋한 音響들을 위하여.....

                             -[밤안개 속에서] 전문

 

이 시편은 '눈(안개, 장미, 철학)귀(신앙, 소리, 음성)의 대위에 기본 발상법을 빚지고 잇다. 김현승시편에서는 눈(시각보다 귀(청각)에 중점을 두는 영혼이 더 성숙하고 더 궁국에 가까이 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곤 한다. 수염을 깎는 비누거품과 저녁 도시를 감싸고 잇는 안개의 상동성은 감각적 이미지를 즐겨 쓰는 그의 익숙한 기법이 마련한 장치이다. 그것들 사이에는 외형적 유사성도 잇:지만 그 속성에서 유비적 관계 성립이 가능하다. 또한 시이니 헤매는 종점 부근과 골목의 이미지느 ㄴ원래 후미진 공간의 의미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시인은 그곳에서 회한에 잠기고 연륜을 조용히 헤아릴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

" 멀리멀리 흘러갔던/ 보랏빛 구름들과 바다 거품으로 부터/ 그만 나의 연륜을 불러들이자.// 나로 하여금 돌아오는 길목에서게 하여 다오!' [가을의 입상]에서 보이는 길목 역시 위 작품의 종점 부근과 비슷한 이미지를 띠고 있는데 그것은 추억이 공간화된 이미지다. 사물의 실제를 꿰뚫는 '눈' 그것은 신앙을 위하여 아름답고 고요하게 실명 되어야 한다. 참으로 묘한 역설이다. 모든 것(이제까지의 일체의 기성 감각 또는 논리)를 버려야 모든 것 너머에 잇는 실재를 만난다는 것, 김현승 시는 이렇듯 뒤로 갈수록 시각보다 청각적 진리 감득의 지향이 앞서 간다

"산 그늘도 하루를/ 반이나 남아 지웠네/오늘도 스틱을 휘청이며 걷는 종점부근.../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스치는 /나의 영혼- 일식물성 나의 영혼일세" (영혼과중년)에서 보이듯이 종점 부근은 김현승에게 방랑의 이미지와 국외자로서의 이미지를 동시에 주는 장소로 표상된다. 그것은 안개 덮이고 황혼이 지는 저물녘이라는 시간적 이미지와 상통하는데 그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는 이 시인에게 어느새 빨리 흘러버린 세월을 느끼게 해주고 , 중년을 느끼게 해준다. 세월으 바름과 중년의 서글픔을 그는 이처럼 추억의 종점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 추억과 종점의 이미지가 구체적 육체를 얻고 잇는 계절이 바로 '가을'일 것이다.

 

푸른 잎새들이 떨어져 버리면

내 마음에

다스운 보금자리를 남게 하는

시간의 마른 가지들....

 

내 마음은 사라진 것들의

푸리즘을 버리지 아니하는

보석상자-

 

사는 날, 사는 동안 길이 매만져질,

그것은 변함없는 시간들의 결정체

 

지향 없는 길에서나마

더욱 오래인 동안, 머물엇어야 햇던 일들이

지금은 애련히 떠오르는,

 

그것은 내 마음의 오랜 도가니- 이 질그릇 같은 것에

낡은 무늬인 양

눈물과 얼룩이라도 지워 가고자운 마음

 

모든 것은 가고 말았구나

더욱 빨리.......더욱 아름다이.....

              고전주의자 전문

 

빨리 간 것은 아름답다는 것, 이것이 김현승이 말하는 또 하나의 시적 역설이다. 지나간 것들이 추억을 노래하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시적 주체의 하나일 터인데. 그것은 시간적 거리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미적 계기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이중적인 심미적 태도에 기인하는데 그것은 먼 시간적 거리의 여과에 의해 과거의 이미지들이 추함과 미움을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속성과, 그 이미지들이 그렇게 흐릿해졌기에 우리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그것들을 아름답게 꾸리려고 한다는 속성 때문이다. 사라져간 것들이 태마음에. 다스운. 보금자리(롬) 남게" 되고 '내 마음이 사라진 것들이 . ㅣ푸리즘을 버리지 아니하는. 보석상자' 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발짝 간 것은 더욱 멀리 가 잇을 터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사라진 것들의/ 푸리즘을 버리지 아니하는/ 소석상자'는 바로 '변함없는 시간들의 결정체'가 된다.

 

어제.

그 시간을

비에 젖은 뽀오얀 창 밖에 넣어 보자.

 

어제,

그 시간 옆에

멀리 검은 나무를 심어두자.

오랜 그늘을 지키는....

 

어제,

그 시간을

저안 눈물로 닦아 두자.

내개ㅐㅔ는 이제 다른 보석은

빛나지 않으려니...

             ㅡ어제 전문

 

시가은 원래 일차원적인 선조성을 그 핵심 본성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제 ㅡ오늘-내일'이라는 일직선상에 나란히 순서대로 위치한다. 위의 시편에서 시인은 '어제'라는 시간을 두고'비에 젖은 "뽀오얀 창 밖'에 넣기도 하고' 그 시간옆에/ 멀리 검은 나무'를 심기도 하고' 그 시간을/ 정한 눈물로 닦아'두기도 한다. 극서은 그에게 다른 것이 없는 소중한 '보석'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역시 김현승에게 '눈물'은 한의 표상이 아니라, 정화 ?또는 승화의 의미를 띠게 된다. 그것은 삭임과 승화를 통해 영적 희열로 접어드는 역리의 매질로 그 역할을 다한다. 따라서 '어제'는 '내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간 인식은 '내일/오랜 역사보다도 /내일만이 진정 우리가 피고 가는/ 풍성한 흙이 아니냐?(내일)에서도 이어지는데 '오랜 역사'라는 추상적 시간보다도 구체적으로 다가올'내일만이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피고 가는 풍성한 흙(토양)이라는 인식은 그의 시간에 대한 생각을 말해준다.

"지금은 페회와 귀로의시간....//우리의 마음들은 벌써 낙엽이 진다/ 우리의 마음들은 남긴 것 없음을/이제는 서러워한다./ 지금은 먼 길을 예비할 때_/ 집 없는 사람들 돌아와 집을 세우는/ 지금은 릴케의 시와 자신에 /입맞추는 시간...." (가을이 오는 시간)에 보이는 폐회와 귀로의 시간 또한 그 원뜻으로만 살핀다면 상실의 아쉬움에 젖는 시간이고 끝나버린 길목에서 회한을 되새기는 시간이겠지만, 김현승의 사유에서 그것은 곧 상실에서 생성으로 진화하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시인이 "남긴 것 없음을 이제는 서러워"하는 것은 "먼 길을 예비할 때"라는 시간 의식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종료'이 의미가 아니라'영원'과 연결되는 계기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릴케는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라고 하여 정신적 귀의처를 상실한 소외 의식을 보엿지만 김현승을 '집 없는 사람들 돌아와 집을 세우는'귀의처를 제공하고 잇는데. 이는 시인이 소멸의 순간을 통해서도 절망이 아닌 구원의 소망을 피력하고 잇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소멸의 흐름속에 가을이 있다.

 

남쪽에선

과수원의 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산위엔 마른 풀의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릐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누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을의 향기 전문-

 

빨리 가는 것일수록 아름답게 남는다는 '추억'의 이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이 시편의 시간 의식은 독자적이고 매력적이다. 능금이 익고 노을이 타고 풀이 마르고 장미가 시드는 것은 모두 소멸의 이미지이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맬격적인 모습이다. 마치 아름다운 것은 최후의 불꽃처럼 소멸과 동시에 생성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력이 김현승에게는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라고 노래할 수 잇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의식은 '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의 시)에서도 소멸되는 것이 아름답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김현승이 자신의 시 속에서 다루는 시갅거 배경ㅇㄴ 단연'가을이 많은 데. 이는 대개 두 가지 모순된 속성을 공유한다. 하나는 소멸의 이미지이고 또 하나는 열매와 성숙(풍요)의 이미지다. 가을의 시는 가을의 기도와 연작의 형식으로 쓰이어진 작품인데 역시 릴케의 흔적이 강한 작품이다 이 시편은 가을은 눙의 계절과도 연맥된다고 할 수 잇는데 '비둘기 /산까마귀'의 대위, 그 안에서 '위대한 공허'를꿈꾸는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은 ㅈ'저녁 종소리'를 듣고 마른 풀(나무가지의 변주)의 향기'를 마실 수 잇는 중요한 시간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댜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욎ㄱ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ㄹ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이 기도 전문-

 

 

이 작품은 김현승 시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의 관련성으로 해명할 수 잇는 단서를 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에는 신에 대한 강한 열망, 질존적 나그네 의식, 신의 편재성에 대한 인지 등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런한 정신적 기조가 릴케의 돋특한 풍모였음을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사실 관념의 사물화 경향 다시 말해 관념이나 심적 상태를 사물로 번역하는 것은 릴케의 시적 방법 가운ㄷ서도 특히 현저한 것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현승이 구체적으로 사숙한 시인은 없을 지라도 릴케라는 시적 전범을 늘 마음속으로 반추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김현승 시에서 릴케의 흔적을 구체적 미시적으로 찾아내는 등의 비교문학적 유용성은 십분 긍정하더라도 김현승의 시적 사우는 좀 더 개성적인 것으로 접근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도 릴케적 정신의 기조와 김현승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이 혼용된 결실이라고 할 수 잇을 것이다.

우선 이 작품의 청자는 절대자(신)로 상정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그런 설정 자체는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이 싶편은 절대자를 청자로 상정한 기도가 아니라 ,기도조가 불러일으키는 엄숙하고 경건한 정조만이 전면에 부각되어 그 자체가 시의 의미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앞서 이야기한 관념의사물화에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잇다. 작품의 구조느 3인의 평행법에 의해 구성되어 잇다. 그 평행법의 핵심 이미지는 가가각 기도-사랑-고독으로 이어진다. 그 가가에 대한 열망은 가을 이라는 시간성에 의해 구속되는데 가을은 김현승에게 소멸을 동반한 풍요의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소멸과 풍요라는 모순된 이중속성이 또 그로 하여금 사식과 성찰로 나아가게하는 근본적 힘이 된다.  시인은 먼저 기도하느 ㄴ자세를 열망한다. 여기서 기도는 신과의 의사소통의 형식이라는 이파적 의미를 넘어서 명상적 고백과 반성적 사유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산된다. 그래서 시인은 겸허한 모국어 로 채워진 반성과 사색의 시간을 갈구하고 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 곧 그가 지상에서 희구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갈망한다. 여기서 비옥한 시간이란 그러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순수하고 온전한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시간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3연은 작품의 시상이 집중되는 연인데. 그것은 고독의 시적 상관물인 "까마귀"로 집약되고 있다. 김현승 시에서 '까마귀'는 단순한 소재 차원을 넘어서는 중요한 상진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것은 시인의 적극적 분신으로 나타난다. '까마귀'는 그 검은 빛깔과 거친 울음소리로 어둠을 궁극적으로 초월하는 고독의 상징적 의미를 띠는데 그러한 까마귀의 시적 형상은 그의 [산 까마귀 울음소리].[마지막 지상]에서[겨울 까마귀] 등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시편의 3연은 바로 그 '까마귀;에 이리ㅡ는 도정을 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분신의 영혼이 '굽이치는바다'와 '박합의 골짜기'를 지나서야 마른 나뭇가지에 이른다는 암시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다/골짜기'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처럼 어느 일정한 성숙에 다다르기까지의 격정과 그 경험을 포괄하는 상징을 띤다. 또 '마른 나뭇가지;는 온각 것을 다 떨치고 핵심만 남은 본질적인 세계를 표상하는데  그 단순성 및 결정성은 그이 후기 시편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보석'이미지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잇다. 바로 이러한 본질의 세계에 이르는 치열한 도정과 그 결정으로서의 '까마귀', '마른 나뭇가지' 등의 표상은 김현승의 독자적인 시적 사유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가장 독일적인 내면서의 계승자로 알려진 릴케는 한 시대에 국한됨 없이 고독, 불안, 버림받음의 주체를 드러내기 위해 평생토록 처절할 정도로 무섭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며 예술과 겨루어온 시인디다. 그의 몬학은 나르시시즘이 에술화였고, 신과 사랑 그리고 죽음에 관한 본질적 문제를 다루엇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김현승과 릴케는 종교적 성향이라는 기질적인 친화력과 자신을 예술 안에 끊임없이 투시하는 나르시스트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초월자의 사랑과 은총에 순종하느 ㄴ경건과 순응을 다룬 이 작품에서 시인은 순치되는 욕망의 세계를 경험한다. 그것이 신성을 추구하는 시인에게' 까마귀'와 '마른나뭇가지'라는 본질만 남은 세계를 허락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현승이 추구한 신성은 자연 속에 폭 넓게 내재화되어 잇는 것이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봅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이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내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가을 전문

 

김현승 시편은 주로 종교적 상상력에 의거한 관념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잇음에도 비ㅜㄹ구하고 그 관념이 자연 사물의 이미지와 적절하게 결합되어 절제된 아름다움을 획득하고 있다. 그는 '가을'에 관한 많은 시를 썼거니와 그의 시에서 '가을'은 기도와 명상의 깊이로 집중되는 기쁨의 시간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봄'과의 대이 속에서 그 모습과 의미를 뚜렷이 드러낸다. 먼저 '봄'은 '가까운 땅(육체적 성향{. 부드러운 숨ㄱ뎔'에 ,'가을'은 '머나먼 하늘(정신적 성향). '차가운 물결'에 비유된다. 그것은 서술어'일다' '밀려오낟'의 대비에 의해 밀미ㅜㄹ, 썰물의 리듬과도 같이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를 구축한다. 그리고 '봄'과 '가을'은 '꽃잎'과 살'/별과 보석'의 대비를 통해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소멸하는 것과 영원한 것의 대비로 나타난다. '꽃잎과살'은 유한하게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지니지만 '가을'은 깎고 다듬어 정제되면서' 보석'으로 조형화되는 영원성의 이미지인 것이다. 4연은 인체에서 비유를 빌려와 ;봄'과 '가을'을 ㄴ눈동자와 입술에 대비시킨다. '눈동자 먼 봄'은 육체적 열정적 이미지라면, ㅇ'입술을 다문 가을'은 영혼의 차가운 이성의 세계를 표상하낟. 그것은 다시 확대되어 인생을 예찬하는 본방한 감성의 노래와 정제된 정ㅅ긴적 언어의 대비로 나타난다. '입술을 다문 가을'의 이미지는 사색과 침묵의 이미지로서 외계를 향한 마음의 문에 빗장을 질러버린 상태이다. 결국 그것은 그가 즐겨 시화한 ;견고한 고독;의 이미지일 것이다. ;언어의 뼈마디'라느 ㄴ표현 역시 이러한 단단함의 이미지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화려하지만 순간적인 '노래와' 대비된다. 그이 가을에 대한 인식의 편모는 다음 산문 [초가을]의 일절에 잘 나타난다.

 

봄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 되고, 가을에는 가장 깊은 시를 얻는 것이 나의 기쁨이엇다. 이리하여 나는 가을의 외로움이나 슬픔을 모르고 ㅅ갈아왓따. 외로움이 있는 곳엔 가을마다 기도가 잇었고 그 기도에 리듬을 붙이면 시가 되엇다.

 

이러한 단단한 사물의 이미지를 통해 그는 사람의 비참함을 견뎌내는 결연한 정싡거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뼈마디'는 살이 지나가는 물기와 기름기를 제거함으로써 존재의 가장 중요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뼈마디'의 계열에서 '차'의 이미지가 파생한다.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가 좋은 시절....

 

갈까마귀 울음에

산들 야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 긴 밤을

 

차 끓이며

끓ㅇ;먀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젖는다.

                -無等茶 전문

 

이 시편은 단형의 시형 안에 '禪味'가 고아하게 풍겨 나오는 작품이다. 어쩌면 정지용의 절편[忍冬茶]와 비교해 봄직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김현승의 작품 [겨울 실내약]이나 [다형]과도 유사한 정조를 가진 작품이다. 시인이 짜고 잇는 '술/차'의 이원적 구조는 그의 다르 ㄴ실편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인데 시인은 세상사으 ㅣ번쇄한 욕망의 그림자를 '술'에 배치하고 그것을 메마르게 걸러낸 순수 결정물을 '차'에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김현승의 '가을'은 어느 새 '차에 어루리는 계절로 그리고 차가 가져다주는 선미의 시간적 은유로 다가온다. 그래서 어느새 존재론적 고독도 그 자체로 '향기'를 내뿜는 것이 된다.

 

빈들의

맑은 머리와

단식의

깨끗한 속으로

 

가을이 외롭지 않게

차를 마신다.

 

마른 잎과 같은

형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를

두고두고

나만이 호올로 마신다.    

                                               -[茶兄]전문

 

자신의 아호인 다형을 ㅈ레재로 하여 부른 이 노래는 그가 왜 차를 사랑하며 차를 통해 시의 어떤 원숙한 경지를 꿈꾸엇는지를 잘 드러내 보여준다. 차는 '빈들이/맑은 머리'와 '단식의/깨끗한 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질이자 가능성이다. 차를 마시는 가을은 그래서 외롭지만은 않고 오히려 존재의 심층에 가 닿을 수 잇는 역설적 조건을 제공해준다.'마른 잎'과 같은 존재에게서 우러나는 '아무도 모를/ 높은 향기/'는 바로 시인이 고독하게 궁구하고 가 닿는 '시'의 경지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이와 같이 김현승은 세월의 흐름 속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추억(시간화)과 '종점(공간화)'이라는 형식을 통해 형상화한 시인이다. 그러한 이중적 모순을  통합할 수 잇는 가장 좋은 계절적 속성을가지고 잇는 것이'가을'이고, 그 가을 안의 사색이고. 그 사색에 수반되는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