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詩와 철학과 茶道/ 문광훈 문학평론가. 충북대교수

주혜1 2014. 11. 28. 11:20

 

시와 철학과 다도

 

                        문광훈(문학평론가.충북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편집자로부터 내게 주어진 글의 주제는 '시와 차 그리고 철학'이었다. 이 모두는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어떤 근복적인 것-나날의 삶을 이루고, 이렇게 이뤄진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이뤄진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돌아보면서 향유하는 핵심적인 문화 활동들이다. 이 활동들의 근본 의의를 상투적이지 않게  새롭게 돌아보는 일이 가능할까? 무엇으로부너 시작할 수 잇을까? 나느 철학부터 검토해 보기로 햇다.

 

1.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를

 

철학의 근본 의의에 대해서도 물론 여러 관점과 정의가 있을 수 잇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든 납득할 수 잇는 것이어야 하고, 오래 가는 것이어야 한다. ㅣ논리와 체계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납득할 만한 논리가 없는 관점은 '사견'일
 뿐, ;사고는 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계는 얼마나 많은 설과풍문으로 가득 차 잇는가? 이것은 대체로 ';견해'에 해당한다. 그래서 믿기 어렵다. 좀더 믿을 만하여 우리가따를 수 잇는 것은 '사고'다. 사고가 되려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를 내장해야 하고 , 이 논리로 다른 ㅅ가라을 설득시킬 수  잇어야 한다. 논리란 하나의 체계화된 사고다. 그것은 사유의 견고한 축조물이다.

 철학은 간단히 말하여 세계의 근본 질서 혹은 법칙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잇다. 그래서 그 대상은 '본질'이거나 '실재'. 실체'나 '진리'다. 이때의 대상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또 그에 대한 접근 방법에 따라 물론 여러 분야로 나뉜다 그러나 어떤 분야이든, 진리를 탐색하느 인식론이든, 도덕적 실천을 논의하는 윤리학이든 아니면 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미학이든 또 신을 포함하여 초월의 자원을 사유하는 형이상학이건, 있는 것의 토대를 파고드는 재론이든 그것은 모두 삶의 본질을 궁구한ㄷ는 접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본질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잇음'이다. 그것은 가시적이고 현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 현상적인 것의 배후 혹은 그 바탕이다. 그래서 철학의 탐구는 존재자가 아닌 존재 자체에 집중한다.

 

 하지만, 이 본질은, 잘 알려진 대로 20세기에 들어와 흔들리게 되었다. 삶의 불확정성에 대한 이런저런 인식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본질에 대한 물음은 근복적으로 의문시 되엇꼬, 이 의문은 21세기에 와서 매체의 기술적 발달과 인터넷 가상현실의 압도적 우위로 인해 더더욱 강화되엇다. 이제 그 의문은 거의 불신으 경지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우리는 진리도 참도 믿기 여려울 뿐 아니라 신이나 아름다움이 없어도 되는 , 없어도 잘 사는 혹은 잘 살 수 잇는 지경에. 원하든 원치 않든, 처해버린 것이다. 이것을 리ㅜ카치는 '선험적 고향상실'이라고 불럿다. 오늘날 본질이나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것은, 나아가 철학 자체를 거론하기 힘든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신이 없는 겆구이고 본질적 차원을 누락한 가짜이며, 실체로부터 멀어진 표피만의 드라마일 뿐인가?

 그러나 현대적 삶의 이런 근본적 형질변경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본질에 대한 탐구이고, 이 탐구를 통해 비로소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사실 만큼은 아무리 그 추구가 어렵다고 해도 변할 수도 없고 변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삶의 인간적 영위를 위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적 삶의 이런 근본적 형질변경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본질에 대한 탐구이고, 이 탐구를 통해 비로소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사실 만큼은 아무리 그 추구가 어렵다고 해도 변할 수도 없고 변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삶의 인간적 영위를 위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이 '본질에 대한 탐구' 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삶의 일'이라는 , 첨일 것이다. 철학은 삶 속에서 일어나고 삶을 향한 것이며 삶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철학이 추구하는 본질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본질의 현실관련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즉 이렇게 탐색된 본질은 어떤 식으로든 삶에연관되어야 하고, 이렇게 탐구하는 과정 자체도 삶 속에 생활의 나날 속으로 뿌리박아야 한다. 철학은, 엄밀하게 말하여,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기여야 한다. 는 것, 다시 말하여 명사로서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동사로서, 움직임이자 활동으로서 삶의 일상에 닿아있어야 한다. 철학이란 단어가 '사랑'과 '지혜'로 이뤄져 있다면 지혜에 대한 이 사랑은 마땅히 삶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사랑과 삶사랑은 다를 수 없다.

철학의 동사화는 곧 철학의 역동화고, 무엇보다 생활 속에 철학의 뿌리내리기다. 극서은 더 간단히 생각의 생활화라고말할 수 잇따. 이때 생각이란 아무런 생각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만한, 그래서 설득력 있는 투명한 생각이다. 그래서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의 사건이라깁다는 사고에 가깝고, 더 하게는 좀더 체계화된 사고-논리에 가깝다. 논리가 생활과 결부되어 체계적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생활을 '돌아보고 헤아리며 되비추고 곱씹는' 일을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반성의 활동이다. 그리하여 철학의 생활화란 곧 반성적 사유의 생활화다.

생활화된 철학이 반성적 사유라면, 이 반성적 사유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일어난다. 하나느 대상을 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을 햐하고 잇는 주체 자신을 향한 것이다. 즉 반성적 사유는 댜상연관적이면서 주체연관적이다 그러면서 그 무게중심은. 이 반성적 사유가 주체에 의해 추동되는 한, 주체에 잇다. 그리하여 반성적 사유는 주체/나로부터 시작하여 대상/세계로 나아가고 이렇게 대상으로나아간 후 다시 주체 자신으로 돌아온다. 반성적 사유는 타자지향적이면서 자기회귀적인 것이다. 이런 타자 지향과 자기회귀 사이를 오가면서 사유는 주체의 삶과 현실, 세계와 그 너머를 돌아본다.

이러한 운동-사유의 대상지향적이고 주체회귀적인 운동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운동 속에서 사유는 비로소 추상적 껍질을 벗어나 현실적 적절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 현실관련성 속에서 사고는 비로소 죽은 개념 혹은 쓸모없는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논리 혹은 살아잇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철학서와 이 철학의 그 많은 개념어를 떠올려보라. 그것이 과연 어디에 쓰이고 잇고, 무엇에 소용되면, 지금 여기 나의 삶에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느 지를/ 니체는 죽은 언어를 가리켜 '개념이 미라'라는 말을 쓴 적이 잇지만, 지금 여기 나의 삶에 자양이 되지 못한다면 철학이란 죽은 관념일 뿐이다.

그렇다면 살아잇는 철학, 살아잇는 고나념과 개념과 논리를 왜 필요한가? 우리는 왜 생각해야 하고, 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유해야 하는가? 생각 없이도 아무 말이 없고, 철학하지 않아도 잘 살고 잇지 않는가? 정말 그렇지 않는가 ? 이것은 낡은 물음이지만, 그러나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2,. 슬픔- 곳곳에 한계

 

인간은 많은 일을 하고 잇꼬, 도 역사적으로 수많은 업적을 이뤄온 존재이지만, 말할 것도 없이 취약한 존재이기도 하다.그가 해내는 일은 신기하고 놀랍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 일은 하지 않은 일에 비하면 여전히 미약해 보인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미약하여 차라리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 존재의 취약함은 무엇보다 그의 생물학적 조건을 고려하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물 속에서 1분 2분을 쉽게 견디지 못하고 한두 끼만 걸러도 성질이 사나워진다. 그는 여기 있으면서 저기 동시에 있지 못하고, 어제와 내일 사이를 건너뛸 수도 없다. 시공간적 제약이 그를 조건 짓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제약은, 좀더 따져보면 곳곳에 잇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말을 한다'고 하지만, 또 '의식 잇는'존재라고 하지만, 그의 말은 제대로 기능하는가? 나의 말은 분명하면서 완전한가? 나는 나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이렇게 표현된 내용을 너나 그들에게 전달할 수 잇는가? 나는 또 올바로 생각하는가? 나의 행동은 어떠하고, 내가 견지하는 가치는 타당한 것이낙? 나는 이웃과 잘 교류하고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시민으로 살아가는가? 아니 이 모든 것 이전에 나의 삶을 바르게 살고 잇는가? 여기에 언급된 기준들...잘 이나 올바로 혹은 제대로 된 나 타당한 이란 술어는 내게 무척 버겁다. 그래서 편하질 않고 때로는 두렵다.

이러한 물음을 우리는 좀더 심각하게 던질 수도 잇다. 내가 하는 말은 온전한가? 우리가 쓰는 말은 허술하지 않는가? 우리의 사고는?  아니 언어와 사고 이전에 나의 감정은 믿을 만하고, 내 마음은 순정한 것인가? 그래서 지금의 영혼은 '아직까지는 혼탁하지 않다.' 스스로 자신할 수 잇는가? 아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잇다. 내 삶은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믿을 만한가? 이런 일련의 물음 앞에서 나는 그렇다고 자신 잇게 답변하지 못한다. 그것은 대체ㅐ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질문들이고, 그렇다고 지금 답변할 수 잇다 해도 그 답변은 몇 차례의 망설임 끝에 이뤄진다.

 우리는 감정과 언어, 표현과 사고와 행동에 크고 작은 제약을 겪을 뿐만 아니라. 이 감정과 언어와 사고와 행동으로 구성되는 삶 자체에 서투름 혹은 취약함을 느낀다. 인간의 삶은 감정과 언어와 사고와 행동에서 어떤 결정적 하자-근본적인 결핍과 누락을 내포한다. 그리하여 그에게 오나 실수는 되풀이되고, 오해나 불신은 불가피해 보인다. 나는 개체적 인간 실존의 어두운 내면을 떠올리고, 이 인간들로 이뤄지는 사회의 불합리를 눈앞에서 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역사의 퇴행이나 문명의 파국 같은 어휘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편재화된 제약의 토대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 육체의 한계이고 이 육체의 삶을 구성하는 감성과 사고와 언어의 한계일 것이다.

 이런 이류에서 나는 슬픔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슬픔이란 거듭 강조하여 어던 변덕스런 감정이나 감상이 아니다. 감정에도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심층 감정이다. 심층감정으로서의 슬픔이다. 그것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이나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다. 감정에서도 그 모든 요소가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변치않는 저류가 잇따 이 저류로서의 깊은 슬픔은 싦의 불가항력적 한계에서, 이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생겨난다'. 불가항력적이란 '어쩔 수 없다' 는 것이고 그래서 그와 다른 가능성이 차단된 어떤 막다른 상태다. 불가항력의 조건이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어떤 난관이괴, 따라서 거의 운명적인 조건이다. 비극이란 이 불가항력적 난관 앞에서의 드라만다. 만약 인간에게 어떤 출구가 잇다면 그것은 '근본적 제약 속에서의 축구' 일 것이다. 그러니 이 앞에서 마냥 즐거울 수 없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대체적인 슬픔 속에서 잠시 미소 짓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른다.

 불가항력적 인간 한계들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게약에서 온다. 그것은 살아있음에서 오는 제약, 살아있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제약이다. 이 제약 혹은 벽으로서의 죽음을 우리는 경험 하거나 전달 할 수 없다. 이 경험과 전달의 내용이 먼저 느껴지는 것이라면, 경험과 전달의 언언적 한계는 감정이 한계이기도 하다. 또 감정이 사고됨으로써 좀더 높은 수준으로 객관화되는 것이라면, 감정의 하계와 사고의 한계는 서로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의 한계란 감정과 언어와 푷ㄴ과사고 그리고 행동의 총체적 한계이고, 이 한계의 집적물이 삶이라는 오류 덩어리를 구성한ㄷ. 아마포이흐트방어 가 [고야]라는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저 깊은

품으로 뛰어드네

왜냐하면 우리는

그토록 짧은 시간만

이 땅에서

사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는 죽어 잇으니까

 

아마 인간 삶의 모든 행위는 이 불가항력적 근본한계-말하자면 '그토록 짧은 시간만 이 땅에서 살고','그토록 오랫동안 우리는 죽어잇다'는 한계상황적 사실로 수렵될 것이아. 적어도 이 근본한계에 대한 인식 없이는 그 어떤 인간적 업적도 업적답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견디며 오래 가거나, 의미있기가 어려울 것이다.

문학예술은 언제나 바로 이 점을 의식하고, 바로 이 점을 주체화한다.시는 특히 그렇다. 말하자면 근본적 한계 앞에서도 이 한계를 넘어설 수 잇는 혹은 설령 넘어설 수 없다고 해도 그 한계 너머를 바라보고자 그것은 애쓴다. 그리고 이 한계주시에의 노력이 곧 한계를 넘어설 수 잇는 어떤 단초를 열 수 있다고 문학예술을 생각한다. 아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자 한다. 이 믿음 속에서 이뤄지는 표현이야말로 이미 한계 너머의 지평을 여는 혹은 열 수 잇는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시인과 예술가는 믿는다. 그래서 그는 쓰기를 멈출 수 없다. 우리는 그토록 오래 죽어있을 테니까 입김이 허공 속에 머무는 그 짧은 순간 동안만, 지금이란 현재가 몇 차례 되풀이될 그 잡시 동안만 우리는 여기 이땅에 어울려 살아가고 또 살아갈 것이므로 시는 이 허망한 입김 속에서의 숨결부여이고 생명의 산풀이다.

 

3. '서러움의 역류' 구석-변두리-어둠

 

인간의 많은 활동은 그것이 학문이든 문화든 아니면 나날의 생활이든, 정도의 차이가 있는 채로 이 한계를 넓히는 대로 이어져 있다. 특히 예술은 그것이 이 한계작업을 의식적으로 행하고 적극적으로 주제화한다는 점에서, 다른 활동과는 구분된다.

 예술 가운데 시는 , 시의 촉수는 삶의 한계에매우 민감하다. 사실시의 감수성을 채우는 것은 삶의 가능성 자체가 아니라 그 하계라고 할 수 잇다. 시인은 삶의 업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미비르 노래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이 한계로서의 불충분성 앞에서 시인은 자주 머뭇거리고주저하며 괴로워하면서 뒤돌아본다. 김수영의 시 가운데 널리 알려진 거미(1954)는 이렇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엇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간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시인의 설움은 그가 바라는 것이 잇기 때문이다. 이 갈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는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일을 꺼리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린'다. 그러다가 이윽고 그는 이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하게 된다.

여기에는 시인이 걷는 4단계의 경로가 있다. 그것으 '열망과 체념과 재시도의 덧없는 사이클'이라고 부를 만하다. 첫째, 그가 품은 열망이 있고, 둘째 이 열망 때문에 이뤄지는 서러움과의 만남이 잇으며, 셋째, 이 만남의 결과로서의 타버린 몸이 있고,. 넷째 서러운 풍경에 대한 미움이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시인이 무엇인가를 바라는 한, 그래서 좀더 나아지고 좀더 앞으로 가려는 한 외면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서러움과입을 맞추고, 이 서러움에'몸을 태우는 '일을 계속해 간다. 뭔가 나아지고 나아가려 하는 것은 미움과 서러움 그리고 태움 없이는 어렵다. 시인은 서러움과의 접촉을 통해 자기 몸을 태워가며, 열망하는 것이다. 몸이 새까맣게 타들어가지 않고 우리는 삶의 갱생을 도모할 수 없다.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드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짓만을 구태어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엇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

 

싱인은 '설움을 역류하는' 것이 '야릇한 것'임을 잘 안다. 그 때문에 그것이'우둔한 일'임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그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도 그는 '믿'는다. 이같은 믿음 속에서 그는 '자기의 시간

을 찾는다. 삶의 서러움과 만나는 것은 그 한계를 만나는 것이고 이 한계와 만나면서 시인은 서러움을 역류하려고 애쓴다. 극서이 그의 삶이다. 그는 마침내 자기의 시간을 만들어간다. 서러움과 만나는 것은 마치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탑머리'는 일이지만, 이렇게 몸을 태우며 그는 좀더 높고 넓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애쓴다. 서러움의 역류는 이토록기이하고 모순에 차 있다

시닌은 서러움의 역류 속에서 삶의 한계를 직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앞보다는 뒤의 구석에 머물고, 중앙보다는 두리에서 더 자주 서성인다. 그에게는 빛보다느 어둠이 더 친숙하기 대문이다. 그는 어둠을 통해 빛의 편향과 왜곡 그리고 그 귀중함을 드러낸다. 진실은 이 가장자리에 빛이 제대로 비쳐들지 않는 변두리에 자리한다. 그것은 잘 드러나기보다는 드러나지 않은 채 실현된 형태로서보다는 잠재된 형태로 잇따. 이 어두운 가장자리에 많은 것은 없는 듯이 잇다. 그래서 가장자리는 부재의 자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부재는 더 큰 존재에 에워싸여 잇기 때문에  좀더 진실하다고 볼 수 있다. 진리의 자리는 중앙적이기보다 변두리적이다. 진리는 존재보다는 부재에 가깝다. 그리하여 시는 한계-구석 -변두리 -어둠-부재를 선호한다.

그런데 구석이나 변두리 혹은 어둠에 경사는 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 예술일반의 원리이고 지향점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예술을 일러 부재에의 참여라고 쓴 적이 잇지만, 예술은 지금 여기에 자리하지 않은 것에 늘 주의하고 주목한다. 그러면서 부재하는 것들의 현존적 권리를 회복시키려 한다. 예를 들어 베라스케스가 자화상을 그랫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일을 도와주던 조수 후안 데 파레하를 그린 것도 -여기에 대해서는 김우창 선생이 번역한 엘리자베스 트레비뇨의 동화 [후안 데 파레하]가 있다.- 또,[긍정 광대 후앙 카라바자스]와 ][궁정난장이 프란시스코 레츠카노] 를 그린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400년 전의 사람들이지만, 벨라스케스의 붓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 이름과 실존을 얻게 ㅚ는 것이다.

시의 자리는 구석과 변두리이고, 이 변두리에서 어둠을 비춘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자기 삶을 돌본다. 그런 점에서 시를 쓰고 시를 읽으며 시를 느낀다는 것은, 마치 철학이 일상에 삼투하면서 이윽고 철학하기가 되는 것처럼 이 삶에 깊게 뿌리내리는 일이다. 차를 마시는 일도, 다도에서 거듭 강조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4.다심茶心- 마른 마뭇가지처럼

 

나에게 차를 마시는 일 혹은 다도 혹은 다심 곧 다형 김현승시인을 떠올리게 한다. 왜 그런가? 알 수 없다. 나는 다도라는 말에서 지식산업사가 '한국현대시문학대계 17번'으로 펴낸 은회색 시집'김현승(1982)을 떠올렸고, 이 두꺼운 책의 첫 장에 실린, 시인의 낡은 흑백 사진이 생각낫다.

차를 마시려면 우리는 발걸음음 멈춰야 한다. 하던 일을 접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주위를 잠시 돌아보게 된다. 차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돌아보고, 또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숙인다. 차를 마시는 것은 그 자체로 정지와 명상, 회고와 정권을 내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 마음 속 내면에 귀기울이는 일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밖의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차를 마시며 안으로 참잠하는 것은 그밖을 우리를 둘러싼 외부현실을 좀더 정확하게 보기 위함이다. 이것은 차에 대한 그의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등다無等茶]를 읽어보자.

 

무등다武等茶

 

가을은

술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

 

갈가마귀 울음에

산들 여위어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

바람이 지나가는

 

남쪽 십일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

끓이며

외로움도 향기인 양 마음에 젖는다.

 

김현승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어떤 것이든, 그이 시는 산과 나무, 가을과 겨울과 고독. 저녁과 작별과 고독을 노래하고 있고, 이렇게 노래하면서 만들어지는 어떤 소박하고 담백한 분위기 속에 녹아드나. '절대고독'이나 '고독의 순금'을 노래한 시편들은 , 그 절대한 순수성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단조롭고 구태의연하지 않나 여겨지기도 한ㄷ. 하지만 그것은 현실롤부터 고립된 낭만 취미도 아니고 밀폐된 자아의 광잉의식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ㅂ보다 혀실 속에서 어떻게 시적 '양심의 금속성'(김현승)을 견지해낼 것인가라는 오랜 연마의 결정체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가을은/술보다 /차 끓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