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상처로 치유되는 상처

주혜1 2005. 10. 24. 16:23
 

상처로 치유되는 상처


 교회 봉사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교회에 나왔듯이 응답하는 사람만이 하는 일이다. 우리 몸이 고달파야 기뻐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공짜로 사람을 부리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닫는 사람은 즐겁게 봉사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이 정해주신 길을 걸었고, 앞으로도 그런 마무리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행복할 때는 욕심을 키우고 살다가 어려운 일을 당한 후에야 놓치고 만 행복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음을 거듭한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게 된다.

 나 역시 인생 최대의 어려움에 처해 웅크리고 있을 때, 수녀님께서 방문교리를 하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내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씀을 전하랴 싶었으나 수녀님의 의도를 너무나 분명히 알기에 못하겠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나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하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묘한 위로감도 있었다.

  방문한 첫날, 남편이 안내한 지하방 한구석에 온 몸이 뼈만 남은 한 여자를 보고 이 정도로 심각한 환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놀랐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사는 것만 같은 그녀를 두고 등 돌려 나가는 남편의 어깨에 드리운 그늘만큼이나 어두운 이 가정에 연민의 정이 솟았다. 머지않아 혼자가 될 남편이 얼마나 힘들지 나는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선 귀찮다는 반응부터 보였다. 좀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침 하교한 중학생 딸에 대해서 묻자 말문을 트고는 남편에 대해서는 눈물까지 보였다. 그동안 개신교 교인이며, 절에서도 여러 번 왔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종교에 심취해 보려고도 했으나 잘 안 된다면서 붙잡고 큰소리로 기도해 주는데 더 거부반응이 오더라고 했다. 이번엔 성당에 다니는 친정 언니의 부탁이라 거절하지 못했단다.

  환자의 시간을 너무 뺏는 것 같아 글씨 쓰는 데는 무리가 없냐고 묻고는 남편과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놓으라는 숙제를 내주며 일어섰다. 막 문을 나서는데 그녀가 처음에 냉랭하게 대한 것을 사과한다면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는 감격했다. 종교는 강요하면 오히려 도망가고 싶기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려던 것이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이야. 나는 웃으며 우선 숙제부터 잘 하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너덜너덜해진 나의 상처도 내 스스로 치료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시는 것만 같았다. 

 그 후, 짜증만 내던 남편에게 야속해만 하던 딸에 대해, 그녀는 자신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글 쓰는 순간 행복했다는 그녀의 감동적인 글을 남편도 딸도 읽었을 테니 어두운 지하방에 환한 불이 켜진 것만 같았고, 나도 내 자신의 그늘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휠체어에 탄 채 영세를 받았고, 목발을 집고 성당에 나가더니 그 목발마저 버리고 이제는 레지오에 입단하여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와 나의 새 삶은 샤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삶을 이어간다.’ 는 말로 공감을 느끼게 한다.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아드님을 성전에서 찾으셨다’ 는 말씀도 어려울 때 방황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 가면 구원을 얻는다는 신비를 가르쳐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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