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낭비한 죄
신학자 하아비 콕스는 ‘세속도시’라는 글 속에서 한 인간이 생의 의미나 도덕적 가치를 조롱하는 그 냉소로부터 세속화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인생에 대해 거룩하고 향기로운 상징들은 모두 무너지고, 영혼의 방부제 역할을 하던 종교나 신화는 지나치도록 사사로운 것이 되어 버리는 과정이 바로 세속화의 길이라고 했다. 예수의 가르침이 지닌 참된 뜻은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한때 크게 히트한 적이 있다. 살인의 누명을 쓰고 무고한 옥살이 끝에 지옥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스토리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며 떳떳하게 항변을 하나, 재판관은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법은 어기지 않았을지 모르나 너에게는 인생을 낭비한 죄가 있다.”
인생을 낭비한 죄. 분명히 법에는 없는 죄목이다. 자유와 권리를 상실하고 난 후에 ‘빠삐용’은 이렇게 절규한다.
“열심히 살았다면 인생을 낭비한 죄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질서와 도덕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사고를 어른들이 따라갈 수는 없지만, 그들의 생활태도는 이해하려고 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는 아이들이 장래 사회에 나가서 자신이 맡은 바 일을 책임 있고 성실하게 해낼 수 있을지 우려된다.
얼마 전에 있었던 가요 콘서트 현장의 압사사건은 오늘의 질서 부재가 낳은 소치라고 보겠다. 오래전 서울역 압사 사건 이후 질서의식의 실종이 다시금 확인된 현실이다. 이것은 요즘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다. 자유와 방임을 혼동하고, 질서를 구속인 줄 아는 아이들, 선생은 단지 직업인으로만 보고 연예인에 광분하여 교복도 배꼽이 나오게, 허벅지가 드러나게 줄여 입는 현실. 학교에 바라는 게 뭐냐고 물으면 지금도 지나치게 자유롭건만 ‘두발자유’라고 부르짖는 아이들. 교실을 쓰레기더미로 어지럽히고, 가장 중요한 순수성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이 과연 지식을 넣어주는 일이 다일까 하는 회의가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랑의 매’라고 부르던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함부로 들다가는 오히려 다치는 수가 있으니 우회적인 방법을 쓰거나 아예 속편하게 무관심해 버린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이후, 학생들을 통제할 수가 없어진 것도 원인이지만, 부모들이 모두 바쁘게 생활하는 동안 아이들의 의식을 붙잡아줄 줄이 끊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물질에 연연하다가 자식에게 남길 정신적 유산은 포기해 버린 것 은 아닌지. 아무도 이젠 가정에서 헌신과 사랑, 질서나 신념, 그리고 예의에 관해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마치 신의 은총에서 멀리 떠난 상태에 있는 것만 같은 아이들이 ‘빠삐용’처럼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짓고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 후회하지 않도록 우리 가정과 교회가 할 일이 시급하다.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상태에 이르러서는 신앙심으로 인내를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영웅적인 행동이라고 하겠지만, 하아비콕스가 주장하듯이 교회가 신성한 것과 내세에 대한 일에만 관심을 쏟을 게 아니라, 그 가치를 현실에서 찾았으면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은 도덕적 가치관이 서 있었으니, 우리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자. 그리하여 하느님께 맡겨보자. 적어도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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