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화려한 슬픔의 별, 연꽃마을 김주혜 시인을 찾아서
윤 정 구
가장 아름다운 이름의 문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올해에는 김주혜 시인이 받는다고 한다. 시회에 잘 나오지도 않고, 동안거 끝나면 곧바로 하안거를 준비하며 용맹정진하는 수도자처럼, 남몰래 숨어서 가끔 시퍼런 시의 칼날만을 번쩍 내보이곤 하는, 강호의 숨은 고수 김주혜 시인을 찾아내어 뽑았다니, 늦은 대로 시인상을 뽑는 시인들의 눈밝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유월의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시인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고 했던가. 김주혜 시인의 시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세 권의 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1992), 『아버지별』(1998), 『연꽃마을 별똥별』(2008)을 다시 읽고, 그의 진가를 확인한 기쁨으로 여진(餘震)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사동에서 시인을 만난 것이 꽤 되었다. 지금은 아프리카에 나가 봉사하시는 Y 신부님이 잠깐 들리셨을 때 인사동에서 뵈었으니, 오륙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소식이 뜸해지면 조금 서먹해지기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김주혜 시인은 여전히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이다. 얼굴도 세월이 비켜간 것처럼 옛날 그대로여서, 상대적으로 나만 혼자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쑥스럽네요. 고마워야 하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더 커요.”
축하 인사에 시인의 제일성은 부끄럽다이다. 부끄러움은 옛사람들이 사람다움을 평가하는 가장 원초적인 요소의 하나였던가.
‘부끄러워 할 줄 알아라.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으뜸’이라고 썼던 시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란 시가 생각났다. 상을 주려고 해도 고사한다고 서운해 하시던 선생님도 떠올랐다. 시인에게 최고의 격려가 문학상일 터인데, 그런 연유로 다소의 무리가 따를 수도 있는 문학상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제자들을 조명하고 싶은 마음을 잘 아실 터인데, 대체 왜 그러셨을까?
“내가 내 시 부족한 것 잘 알잖아요?”
지나친 겸손이 결례가 되는 경우가 있다지만, 자리다툼과 경쟁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는 아무래도 목소리 큰 사람의 몫이 큰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오늘은 그러한 손실을 감수하는 듯 인간적 겸양지덕을 지켜내면서도 꾸준한 문학적 열정으로 자신의 시세계를 가꾸어낸 김주혜 시인의 문학의 길을 따라가 보자.
―어린 시절에는 언제부터 문학의 꿈을 가지셨나요?
“아주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의 시조창을 들으면서 컸어요. 창도 하시고, 북, 장고, 춤도 잘 추시던 멋쟁이 아버지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요. 어려서는 사업하시는 아버지를 돕고 싶은 생각에 판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곤 했지요. 공부는 곧잘 했던 것 같아요. 일기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썼고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내내 아무런 구김없이 밝게 자란 모범생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성신여중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산문이긴 하였지만, 장호 선생님, 이성교 선생님 등 쟁쟁한 문인들이 교사로 계셔서 그분들의 격려를 받아 재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김주혜 시인도 맏딸로 태어났어도 위로 오빠 하나를 그만 어려서 잃은 터인지라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시인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외모가 출중하고 선량하셨던 아버지께서 자식사랑이 각별하여 어머니가 아홉째 따님을 낳았을 때도 아들을 바라셨을 텐데 서운한 기색이 없이 가물치를 직접 사들고 오셨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책을 좋아한것이 글짓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특별한 문학에의 꿈이라기보다는 모든 일에 있어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던 꿈 많은 학창시절이었기에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면 국문과 진학도 자연스런 수순이었겠네요?
“진학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여자의 직업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식을 넣어주는 선생님이 제일 좋은 것이니, 너도 선생님이 되라고요.”
할머니 소원대로 사범대학에 진학한 후에야 진짜 문인들을 만나고, 진짜 시를 만났다. 학보사 기자생활을 한 것도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목월 선생님 첫강의였는데, 사슴 같이 맑은 눈의 미남 선생님께서 가슴에 꽃을 꽂고 들어와 강의하셨어요. 진짜 시인을 만난 것이지요. 청춘의 무지개 같은 추억이지요. 그 후에도 선생님은 늘 한 송이 꽃을 꽂고 들어와, 물 흐르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로 강의하셨어요.”
목월선생님께 자작시를 보여드리며 지도를 받고는 하였는데 선생님께서 402행의 장시「바라춤」의 신석초 선생님을 닮았다고 하시며 칭찬을 해주셨다고 한다. 그밖에도 <문장론>을 강의하셨던 소설가 박영준 교수님과 <이조어사전(李朝語辭典)>을 편찬하고, 향가, 고려가요, 고시조를 가르치신 유창돈 교수님, 장서가로 유명한 김근수 교수님 정창범교수님 등 훌륭하신 분들의 강의가 기억에 남는다.
졸업 후 할머니의 소원대로 중학교 국어교사가 된 김주혜 선생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칠 때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 후, 두 아들을 직접 길러야 한다는 남편의 강권으로 천직인 교사직을 휴직한다.
―남편 되시는 분도 교직에 계셨지요?
“ 저와 같은 학교 동료 교사였는데, 머리가 좋고, 눈빛이 강렬하고, 유모어가 있고, 방과후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어려운 학생들 등록금도 내어주고 하는 데 마음이 갔어요.
―시를 쓰시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85년에 주부백일장에서 우수상을 받고, ’86년에 재차 도전하였는데, 공교롭게 시와 산문 두 가지 다 장원으로 뽑혀서, 산문을 포기하고 시로 장원상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고삐가 풀려서, 시를 공부하게 되었지요.”
그 때 심사위원이 시부문에는 홍윤숙, 산문부문에는 서정범 선생이었다.
―그 때에는 시공부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때마침 문예진흥원 문학강좌가 시작된 거예요. 어느 날 아침 대학동창이 전화로 알려주어서 함께 가보았지요. 덕수궁에서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했는데, 구상, 조병화, 황금찬, 박희진, 성찬경, 오규원, 홍윤숙, 성춘복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강의를 하시는 거예요.”
‘87년부터 ’88년까지 2년을 결석 한번 없이 신이 나서 다녔다고 한다. 다시 시작한 시공부도 좋았고, 제2의 문학소녀가 된 또래들을 만나는 일도 좋았다.
이화숙, 안영희, 박승미, 한정명, 전영주, 하영 등 내노라 하는 열정파 예비시인들을 만났다. 성찬경 선생님께서 김 시인의 한국어발음이 정확하다고 칭찬을 해주신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러나 열화 같은 호응에도 불구하고 특별기획강의는 종결되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문학아카데미>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박제천 사숙의 대학로 <소금창고> 강의이다. 전혜린의 학림다방 옆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온 이화숙, 김정아, 하영, 지인, 이섬 등과 후일 <시와 함께> 동인이 되는 박승미, 이창화, 전영주, 고옥주, 이섬 등이 함께 특별 실전 시공부로 날을 갈고 세웠다.
‘90년 가을이었다. 새로 창간된 <민족과 문학>의 야심찬 제1회 신인상을 공모하였고, 그 출간 의도에 감동한 시인은 스트레스」외 4편을 응모, 당선하여 새로운 시의 참신함을 시단에 알리고, 후일 200명이 넘는 시인의 배출된 <문학 아카데미>의 미래를 예고하였다.
그때의 당선작 「스트레스」를 읽어보자.
섬진강산 물고기 한 마리를 욕조에 풀어놓았다
놈은 낚시바늘을 입에 꽂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튕겨져 나온 회색빛 눈망울을 굴리며
부르튼 입술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놈은 함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것만 봐도 알수 있다
내버려 둔다 (제깐놈이 별 수 있을라구)
놈은 미친 듯이 속력을 낸다
내 눈은 똑같은 속도로 따라간다
놈은 마치 꺾을 수 없는 냉정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내가 다가가자 놈은 다시 사나운 자세로 몸을 떨며
물 밖으로 튀어 오른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너와 나 모두)
―김주혜 「스트레스」 전문
그 때의 심사위원이었던 신경림 시인은 ‘이 정도면, 신춘문예에 내지 왜 여기에다 냈느냐?’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심사평을 썼다.
이번에 새롭게 만난 김주혜 시인은 서로 다른 감성과 공감으로 빛과 소리를 만들어 낸 분이다. 아주 깊은 땅 속에서 햇빛과 만나기를 주저하던 옥돌을 캐내는 기쁨으로 새 신인을 시단에 밀어낸다. 김주혜의 「스트레스」 외 4편은 우리네의 일상적 삶을 아주 잘게 썰어내고 있는 세기(細技)에 먼저 눈이 번쩍 띈다. 시를 가지고 사회라는 커다란 덩어리와 끙끙대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혈관 실핏줄 같이 가느다란 실로 우리가 미처 들어보지 못한 세계를 바느질하고 있다, 이처럼 꼼꼼하게 시를 쓰기까지의 피흘림은 어떠했겠는가.
―심사위원 신경림, 이근배
극찬을 받으며 등단하는 시인의 당선소감은 담백하다.
무언가 바스락거리고 싶은 마음에 잠깐 골목길에라도 나가보자던 것이 그만 되돌릴 수 없는 발길이 된 기분이다. 평소 곤충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졌었다. 매미의 참을성, 육각형의 마술사 꿀벌, 지극한 모성 속에 죽어가는 거미의 일생, 놀라운 지능과 재능을 가진 개미사회의 징서 등…. 작고 하잘 것 없는 곤충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불가사의한 지혜가 어쩌면 더 효과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경의로움을 느껴 나름대로 나와 연결지어 생각해보곤 했다. 그것들이 재목이 되어 보잘 것 없는 둥지를 틀곤 했다. 이제 그 둥지에 문패를 달아주신 <민족과 문학>사에 감사를 드린다. 늦은 출발이지만, 넘어져도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올리겠다는 정신으로 시를 쓰겠다. 이제껏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멀고 험한 길임을 알기에 겸허한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한 내달음을 하겠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
뽑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자신감을 갖도록 격려해주신 박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내 곁에 정말로 좋은 친구들께 이 영광을 돌리며, 좋은 시를 쓰겠다는 다짐으로 게도에 대신한다.
―김주혜 ‘90년 가을호 <민족과 문학> 당선 소감
시인의 시를 읽으며 역시 좋은 시는 그 좋은 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시인에게 ’정공법처럼 바람직한 공부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92년에 상재한 처녀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를 평한 신덕룡 교수는 발문을 통하여 아래와 같은 평가를 하였다.
김주혜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적인 서정과 대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세계를 열어간다는 것과 극히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실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덕룡 『때때로 산이 되어』 발문
’영악하지 못한 나는 외롭고 춥다. 그 중얼거림이 더 사랑하고, 더 감동하고, 더 사람다우라고, 시를 쓰게 한다‘는 시인의 말로 시작하는 두 번째 시집 『아버지별』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아버지에의 그리움과 사랑을 엮어 바친 사부곡(思父曲)이자 여덟 동생들과 더불어 나누는 그리운 시절의 귀향가였다.
‘아버지는 내가 갈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을 보여주신다’(아버지 별 8)는 아버지는 시인에게 마르지 않는 시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억장」을 비롯한 「아버지별」 연작시는 시인에게 필을 들게 하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버지별』의 발문을 쓴 신경림 시인은 재미있는 또 하나의 면모에 주목한다. 즉 ‘햇빛과의 동침(「동침」)이나 수술대의 개구리처럼 예측을 벗어나는 상상력의 장치와 행간을 활용하는 서술법의 묘미와 반전의 알레고리’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이승하 시인도 ‘진부함을 신선하게 바꾸어내는 시적 에너지’에 주목하였다.
필자 역시 위악적이랄까, 시인의 천연덕스러운 야한 시를 감탄하며 재미있게 읽은 경험이 있다. 예컨대 「매생이를 아시는지요」 같은 경우이다.
가을 여행길, 대보름달이 뜨면 몸이 뜨거워진다고 했더니 남녘 시인이 화들짝 놀라며 매생이 같은 여자란다 펄펄 끓는 국물에 매생이를 넣으면 퐁퐁퐁 뿜어져나오던 뜨거운 열기가 사라지고 금세 새치름한 진초록빛 바다가 차갑게 펼쳐진단다 그 냉랭한 자태에 속아 그만 덥석 떠먹다가는 영락없이 혓바닥을 데이고 만다니, 고게 바로 매생이국의 내숭이 아니고 무엇이랴 매생이국 같은 여자! 겉으로는 차거워 보이지만 건드리면 뜨거운 열정이 훨훨 살아나는 여자 멋지다 내가 그런 여자라니
……내게 데이고 싶은 사람, 어디?
―김주혜 「매생이를 아시는지요」 전문
―실제로 야한 구석이 있으신가요?
“풍류를 즐겨했던 아버지의 끼를 많이 받은 동생들이 있기는 합니다. 국악을 하기도 하고, 나이 들어서도 아직도 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하는데, 나는 장녀라는 압박감 때문이었는지 전혀 야한 구석이 없는 것 같아요. 시야 뭐 전혀 다른 쪽의 내가 나오기도 하는 것이니까, 야한 쪽으로 가면 재미있게 따라갔지요.”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단란한 가정을 지켜왔던 ‘자작나무 숲보다 깊은 가슴을 가진’ 분이 떠나고, 아이들과 함께 밤바다를 항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언 십 수 년, 아들 둘은 잘 자라서 모두 가정을 이루었고, 제 길을 잘 가고 있다. 의무를 다한 시인이 ‘떠나는 게 떠나는 것이 아니고, 가슴으로 들어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산문으로 모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던 것은 근래의 일이다.
―시는 주로 언제 쓰세요?
“새벽 미사에 다녀와서 아침나절에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씁니다. 독서를 하고 노트를 정리하다가, 또는 컴퓨터 서핑하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쓰지요.”
―선생님이 꼽는 대표작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요?
“대표작은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시인에게는 아직도 불러야할 노래가 남아있어야 하겠지요.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물론 있지요.”
―30년간, 아니 평생 시를 써온 시인에게 시란 무엇입니까, 무슨 의미일까요?
“나에게 피난처라 할까요? 내가 살아오면서 좌절도 하고, 대체 뭘 했나 허무하다가도, 한 편의 시라도 쓰면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흔들리는 나 자신을 회복하고, 위로 받는 도피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톨릭에 귀의한 것은 언제입니까?
“‘89년입니다. 그전에는 할머니따라 절에 다녔어요.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에도 나가 법문도 들으며, 반야심경, 천수경도 다 외웠지요. 그러다 하느님을 알고 천주교에 입문을 했어요. 종교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저는 신이 있다고 믿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성당에서 봉사 활동도 많이 하시는 줄 압니다마는…….
“레지오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보통 한 달에 다섯 집을 방문합니다. 다른 관계의 사람들보다 교우들과의 활동이 본연의 자세를 찾게 하고, 조금은 큰 사랑의 관계로 맺어주는 것 같아, 기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에 대한 계획은
“나의 시가 여태까지 내게 주어진 인연과 현상에 머물러 왔다면, 이제는 조금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고, 새로운 상상력으로 창의적인 시를 쓰고 싶습니다. 감상적인 것보다는, 보다 인간적인 시, 사회성이 있는 시도 써보고 싶고요. 졸시 「프로이드의 의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후의 다양한 시도도 해보고 싶습니다.”
―여한은 없으시지요? 이제부터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왜 여한이 없겠어요? 살다보면 여한 투성이지요. 삶은 매 순간 선택을 강요하였지요.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잖아요? 한 끗 차이인데, 현명하게 돌파구도 찾고 했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지요. 이제 좋아하는 여행도 좀 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따라갈 생각이예요.”
그가 보고 싶어 연꽃마을로 달려왔다 숨은 듯이 참선을 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부좌하고 앉은 그의 손가락 끝에 잠자리가 날아와 앉았다 잠자리도 흠찟 몸을 떠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병똥별 한 줄기, 가깜지도 멀지도 않은 하늘에서 내 안으로 곧장 날아왔다 동쪽으로 갈까 서쪽에서 잠을 잘까 이 하늘 저 하늘 떠돌던 별똥별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한꺼번에 연꽃마을 내 가슴 어둠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울음덩이가 불로 타오르고 물보라로 꽃을 피웠다 내 안에 연꽃 향기가 가득 찼다
―「김주혜 「연꽃마을 별똥별」
이미 모든 지혜를 가진 여사제였다. 답도 다 알고 있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빙그레 웃으며 침착하게 다 풀어낼 것 같다. 황혼이 와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황혼처럼 멋있는 시간도 없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시인이 피워 매단 전조등 연꽃마을 별똥별」을 읽으며, 앞으로 남은 시간이 행복하기를 빈다.
'김주혜 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주혜시집해설/ 고명수시인 (0) | 2022.09.29 |
---|---|
김주혜 시인의 [숲속의 헌책방]/ 박제천 (0) | 2017.09.20 |
[민족과 문학] 신인상 심사평 과 수상소감 (0) | 2017.06.13 |
김주혜의 시에서는 바람이 분다/ 시인 전영주 (0) | 2015.10.25 |
첫눈 내리는 날/ 유수화시인 (0) | 2015.0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