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여백
존재의 여백: 종이에 대한 성찰ㅡ조광호신부종이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의 존재 방식은 기이하게도 자기 소거를 통해 완성된다. 종이는 스스로를 은폐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역설적 존재자이다. 그 위에 펼쳐지는 무수한 서사들—사랑의 고백, 미움의 선언, 용서의 간청—은 모두 종이라는 매개체의 투명성에 의존한다. 종이가 자신을 주장하는 순간, 그 위에 새겨진 의미들은 색바래진다. 종이는 완전한 타자에 대한 환대의 공간이다. 그것은 어떤 내용도 거부하지 않으며,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전쟁의 명령과 평화의 노래를 동등하게 품는 이 무차별적 수용성은,시간의 누적된 흔적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종이의 시간성은 과거를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재생산해낸다.종이 위의 글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