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아무래도 나는 떠나야겠네 참을 수 없는 이 열병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나는 가야겠네. 그대 가까이 종이배 하나 띄울 수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 흐르는, 스물 세 돌 그 바닷가 모래톱에서처럼 그리고 성을 쌓겠네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미로의 성을 거기서 바라볼 것이네 잡.. 나의 시 2007.04.26
난을 치며 난을 치며 김주혜 사물은 문득 소리를 죽이고 나 혼자 꿈속으로 들어가 검은 선 몇 개 흰 종이로 남는다 선은 곧게 솟아오르다가 가늘게 떨고 점과 점들은 모여 올올이 음표로 떠돌다가 흐느끼다가 둥둥 딱 북소리 울린다 열두 발 상모자락이 하늘로 치솟는다 치솟아 한송이 꽃망울을 점.. 나의 시 2007.04.26
부활 復活부활 부활성야미사 시간, 앞좌석에 앉은 깡마른 노인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싯누렇게 바랜 성서를 침 묻혀가며 넘기는 그의 모습이 성요셉 같다. 이제 곧 손에서 놓아야 될 손때 묻은 대패를 사랑스레 보듬듯 껍질만 남은 그의 앙상한 손가락마디가 꺼칠꺼칠한 보푸라기를 다 제거한 십자 나무와 .. 나의 시 2007.04.26
현장, 그 빛의 한가운데 현장, 그 빛이 한가운데 철저히 거부했다. 나를 끌어들이려는 그 투명한 감각을 꿈틀거리며 색색의 열대ㅐ어들이 일어나, 통처럼 빛을 쭈렸다 살 속에 박히는 가시광선들 더러는 밥바다의 야광충으로 달라붙고 더러는 해조음의 낮은 톤으로잡아끌었다 흔들리는 바다의 벽, 바다의 천장 그 화려한 움직.. 나의 시 2007.04.26
연꽃 연꽃 그가 보고싶어 연꽃마을로 달려갔다. 숨은 듯이 참선을 하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리를 두고 가부좌하고 앉은 그의 손가락 끝에 잠자리가 날아와 앉는다. 잠자리의 눈에 핑 눈물이 고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구지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며 서있다 .. 나의 시 2007.04.26
소금쟁이 소금쟁이 김주혜 빗방울 전주곡이 흐르는 창가에 앉아 물수제비 뜨는 소금쟁이를 본다 수면은 몸 비비며 은빛 날개를 펴고 생명의 한가운데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꽃이파리 하나 파르르 젖지도 않은 채 떨고 있다 절정의 순간에 떨어져 내린 꽃잎사이를 빠질 듯 빠질 듯 헤쳐가며 상처뿐인 시간의 굴레.. 나의 시 2007.04.26
박모 薄暮 김주혜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가 입을 열고 나무가 몸을 열어 내 몸의 독소를 빨아먹으면 나는 해독된 채 나무의 입에 나무의 가슴에 수런수런 움을 틔운다 한 열정적인 나무를 내 안에 들여앉히고 나는 벙어리 사랑을 시작한다. 눈멀고 귀먹어도 나는 상관이 없.. 나의 시 2007.04.26
채석강 채석강 바닷물이 잠시 자리를 떠난 채석강 바위틈에서 지금 막 미사가 시작됐다. 작은 바다를 이룬 초록 그늘 아래 애기 미역들은 넓은 잎을 벌리며 성가를 부르고 애기 소라와 게들은 납작 엎드려 종신서원을 한다. 그곳에서 나는 햇빛자락에 젖은 몸을 말리는 애기 말미잘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 나의 시 2007.04.26
침묵 침묵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육교 밑에 침묵이 있었다.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다리를 길게 뻗고 흰 천을 뒤집어 쓴 침묵. 이미 몇 동강이가 되어 흩어지고, 부서지고, 일그러지고 툭툭 터져 나간 육체를 짓누르고 낄낄 웃고 서있는 침묵. 사는 게 지겨워지면 곧잘 생각해 본 평화가 저것일까. 발끝에 .. 나의 시 2007.04.26
사과바다 사과바다 네가 얼굴부터 붉히는 이유가 뭐야 하늘이 푸르고 태양이 빛나는 것이 반쯤은 너 때문일 수도 있겠지 가끔 마른번개 꽂힐 때 탱탱하게 물오른 두 볼에 든 모든 추억들을 더 이상 가둬둘 수 없음도 알아 네가 푸른 옷을 입고 창밖에 서 있을 때 네게선 이미 파도소리가 났어 지치고 파리해 보였.. 나의 시 2007.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