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避靜 피정 避靜 바람이 앞가슴에 죄처럼 달라붙는 북한산 정상, 발을 디딜 때마다 나무들이 기우뚱했다. 천근처럼 무거운 내 발목을 붙잡고 붉은 병정개미들이 엉덩이를 들어올린다. 누군가 바위 끝에 솔방울을 매달고 예수처럼 팔 벌려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 나무들 일제히 현기증을 일으키며 어깨를 부.. 나의 시 2006.11.24
연蓮 연(蓮) 그가 보고 싶어 연꽃마을로 달려갔다. 숨은 듯이 참선參禪을 하고 있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거리를 두고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은 그의 손가락 끝에 잠자리가 날아와 앉는다. 잠자리의 눈에 핑 눈물이 고인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구지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 나의 시 2006.11.24
선인장 사랑 선인장사랑 김주혜 말라버렸다. 혈관 속을 흐르는 붉은피톨의 따뜻함도 동공 속을 떠다니던 시린 얼굴도, 가슴을 쓸어내리던 얼음 조각도 모두 사막의 모래가루에 뒤덮여 버렸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다짐했건만 어쩌자고 제 몸속의 물방울들을 죄다 쏟아주고 사방이 막힌 방안에 갇혀 하늘로.. 나의 시 2006.11.24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비가 온다. 물방울들은 부드러움과 매끄러움 그리고 카리스마를 갖추고 주위를 끌어당긴다. 12개의 바이올린이 흐느끼기 시작하자 빗소리를 축으로 한 첼로가 한 줌의 흙이 되어 아스러질 몸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오열하자 내 귓불에 엉켜있던 음파.. 나의 시 2006.11.24
애인바꾸기 애인 바꾸기 나는 요즘 애인을 바꿨다 툴툴거리기나 하고 툭하면 소리나 지르는 옛 애인을 버리고 새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눈부신 남자! 백색의 와이셔츠가 아주 잘 어울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가만 구두에선 구름도 머물다 갈 것 같았다 그는 참을성도 수준급이다 밤새도.. 나의 시 2006.11.24
벙어리사랑 벙어리사랑 내 가슴 속에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나무가 입을 열고 나무가 몸을 열어 내 몸의 독소를 빨아먹으면 나는 해독된 채 나무의 입에 나무의 가슴에 수런수런 움을 틔운다. 한 열정적인 나무를 내 안에 들여앉히고 나는 벙어리 사랑을 시작한다. 눈멀고 귀먹어도 .. 나의 시 2006.11.24
일몰.1 일몰ㆍ1 강이 먼저 주홍빛 자리를 편다 서서히 주저앉는 그를 지켜보는 일은 잔인하다 폭발적인 힘을 가진 그가 저렇듯 약해지다니 지저귀던 새들도 둥지를 튼 지 오래 하나둘씩 켜지는 등불 아래 그는 눈부시도록 위대한 준비를 한다 황금빛 강 사이로 붉은 길을 열고 흰 무명 바지저고리 살포시 여.. 나의 시 2006.11.24
일몰.2 일몰. 2 방안 가득 쌓인 책 정리를 한다 1946년 판 금각사, 죄와 벌, 여자의 일생 손도 대지 못하게 하던 곰팡이 냄새 절은 세로쓰기의 문고들도 한 귀퉁이로 던진다 십여 리를 걸어 빌려왔다던 쓰디쓴 기억들도 함께. 책장마다 그의 체취가 폴폴 배어나와 눈이 아리다 좀벌레도 자리를 뜨지 않는 보물 제.. 나의 시 2006.11.24
일몰.10 일몰.10 그가 떠나던 날 그칠 줄 모르고 내리던 비는 내가 잠든 사이 출렁거리는 물결로 나를 안아주고 잠에서 깨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맞은 편 산이 다가왔다 멀어지다가 기어이 빙빙 돈다 헝클어지는 머리카락, 짓뭉개지는 하늘 그의 입김으로 피고 그의 손끝으로 지던 날들을 손가락 끝에 모아 나는.. 나의 시 2006.11.24
전지剪枝 전지剪枝 벤자민 가지가 수상하다 한 쪽으로만 가지를 뻗고 한 쪽에서만 잎이 돋아나더니 이제는 제 몸의 생살 도려내고도 모자란지 어린 가지에 엉겨 붙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가만히 보니, 병들어버린 가지를 쳐주고 누렇게 변한 잎새를 떼어내 준 지난겨울부터 그것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 같다 오.. 나의 시 2006.11.24